입추도 지나고 다음주면 벌써 9월이지만 올해 유난히 기승을 부렸던 더위는 아직도 꺾일 줄 모릅니다. 연일 35도를 웃도는 그야말로 불볕더위에 에어컨 빵빵한 백화점, 카페, 그리고 영화관은 매출이 크게 올랐다고 하는데요. 꼭 밖으로 나갈 필요 있나요? 집에서도 얼마든지 시원하게 피서를 즐길 수 있는데 말이죠.
집에서 피서를 즐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무난한 방법은 ‘영화’ 보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영화평론가로 유명한 듀나님을 초대해 ‘집에서 볼만한 영화’ 몇 가지를 추천 받아 보려고 하는데요. 일단 고소한 버터에 노릇하게 팝콘을 구워내고 여기에 시원한 맥주까지 곁들이면 영화 볼 준비 끝! 이제 여러분의 오감을 자극할 영화를 추천해드립니다. 주목하세요!
첫 번째로 추천해드릴 작품은 데이빗 로버트 미첼의 호러 영화, <팔로우>입니다. 원제는 <It Follows>니까 조금 어색한 번역제죠. 그냥 의역을 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얼핏 보기엔 미국 틴에이저들을 한 명씩 죽이는 뻔한 호러 영화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보다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바탕을 두고 있죠. 그 아이디어는 이런 것입니다. 저주받은 사람을 쫓아다니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 존재는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고 오로지 저주받은 사람 눈에만 보이며 그 모습은 늘 다릅니다. 그 존재는 느리게 걷지만 일단 잡히면 죽습니다. 이 저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섹스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그 저주를 옮기는 것입니다. 만약 저주를 옮긴 사람이 죽는다면 그 저주는 다시 이전 사람에게 돌아옵니다. 지나치게 복잡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일단 설정을 익히고 나면 이 아이디어는 근사한 호러 영화의 재료가 됩니다. 피와 살이 튀는 자극적인 호러가 아니라 느릿느릿 관객들을 불안하게 하면서 옥죄어오는 스릴만점의 호러영화죠.
관객들에 따라서는 그렇게 무섭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요. 호러의 취향을 떠나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부인할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와 아름다움입니다. 그 분위기는 설정에서 오기도 하지만 섬세하고 담담하게 젊은 주인공들의 묘사에서 오기도 합니다. 이들은 이런 장르에 종종 등장하는 인간 소모품이 아닙니다. 모두 자기만의 생각이 있고 이타 정신도 충분한 호감 가는 사람들이죠. 때문에 그들을 더 걱정하게 됩니다.
영화의 분위기를 완성하는 것은 디트로이트라는 배경입니다. 지금의 디트로이트는 ‘한 도시가 어쩜 이렇게 철저하게 망할 수 있을까’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처절하게 망한 도시이고, 대부분 사람들이 떠난 텅 빈 주택가의 폐허는 거의 재난 영화의 세트와 같은데요. 이러한 배경은 영화의 섬뜩한 기운을 한층 더 고조시킵니다. 호러 감독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거의 광맥이 터진 거죠. 단순한 호러 영화, 그 이상을 즐기고 싶은 분들께 추천 드립니다. 영화가 끝난 순간, 더위는 저만치 달아나 있을 것입니다.
이경미의 <비밀은 없다>는 올해 국내 영화 관객들이 가장 아쉽게 놓친 영화입니다. 비평가들과 관객들이 '무언가 새롭고 다른 것이 나왔다!'라고 긴장한 순간, 영화는 벌써 극장가에서 사라져 버렸죠. 최근 들어 손예진 주연의 영화가 이렇게 확실하게 망했던 적이 없습니다. 이 영화가 어쩌다가 이렇게 망해버렸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 ‘홍보가 잘못되었다’, ‘일반 관객들이 따라가기엔 지나치게 이상한 영화였다’ 등 말이 많지요.
영화는 정치스릴러로 시작합니다. 대산이라는 경북의 가상 도시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데요. 왕년의 텔레비전 앵커였던 종찬은 여당 후보로 출마합니다. 보통 때 같으면 하나마나한 게임이겠지만 이번 선거엔 왕년의 여당 의원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상황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종찬의 중학생 딸인 민진이 실종됩니다. 종찬의 아내이자 민진의 엄마인 연홍은 혼자 수사에 나섭니다.
얼핏 보면 흔한 영화처럼 보이는데요. 영화 <비밀은 없다>는 관객들 기대의 대부분을 깨트립니다. 한마디로 보통 관객들이 생각하는 우선순위를 지키지 않는 거죠. 여기서 가장 재미있는 건 중학생 여자 아이들이 겪는 질풍노도의 시대 묘사를 정치판 음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당연함을 파괴하는 온갖 것들이 다 있습니다만 더 이상 설명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군요.
또한 이 영화에서는 손예진의 최고의 연기를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모범적인 손예진의 연기가 아닙니다. 그런 연기는 영화 <외출>, <덕혜옹주>에서나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전작 <미쓰 홍당무>로 유명한 이경미 감독의 손을 거치는 순간, 배우 손예진의 새로운 면이 터져 나옵니다. 마치 처음 보는 짐승에게 습격 받는 느낌이랄까요? 사라진 딸의 행방을 찾는 재미와 동시에 손예진의 어마무시한 연기력까지 엿볼 수 있는 영화 <비밀은 없다>도 추천드려요!
저스틴 벤슨과 아론 무어헤드의 영화 <스프링>은 얼핏 보면 <비포 선라이즈>의 짝퉁처럼 보입니다. 어머니를 잃고 상심한 미국 청년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고, 거기서 그는 루이즈라는 이탈리아 과학도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요.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루이즈에겐 작은 비밀이 하나 있었지요. 사실 루이즈는 수 천 년 묵은 불사 변신 괴물이었던 것입니다. 어이없지만 흥미로운 아이디어고, 그 때문에 별명도 많이 얻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리처드 링클레터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사생아' 류의 표현을 가장 많이 들었던 것 같네요.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단지 관객들의 시선을 끄는 캐치프레이즈로 끝날 수 있었던 아이디어를 끝까지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이탈리아에서 만난 미인이 변신 괴물이라면 거기서부터 <비포 선라이즈> 흉내는 접고 러브크래프트 호러에 집중해야 하겠죠. 그 뒤에도 로맨스를 계속 다룰 순 있겠지만 로맨스의 종류는 바뀌어야죠. 그게 정상이 아니겠어요?
하지만 영화는 후반부에서도 <비포 선라이즈> 스타일의 청춘 로맨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두 주인공은 사랑에 빠져 있고 끝까지 지적이고 이상적인 대화를 합니다. 이건 심지어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에서도 흔치 않은 일인데요. 그 대화 끝에 맞는 결말까지 제가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이 영화의 장르 실험이 가진 매력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비포 선라이즈>만큼 사랑스럽고 로맨틱한 영화를 찾고 있다면 영화 <스프링> 어떠세요? 로맨틱함에 판타지 요소까지 더해져 여러분의 오감을 배로 채워줄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소개해드릴 작품은 영화가 아닌 넷플릭스 텔레비전 시리즈입니다. 맷과 로스 더퍼 형제가 만든 <기묘한 이야기>인데요. 이제 막 8회짜리 시즌1이 나왔고, 지금의 인기를 고려해보면 곧 시즌2도 나올 것 같습니다. 시즌제라고 해서 걱정하지 마세요. 8회에서 큰 이야기는 대충 마무리되니까요. 그렇게까지 대놓고 열린 결말은 아닙니다.
이야기는 인디애나의 호킨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납니다. 윌 바이어스라는 평범한 소년이 수상쩍은 상황에서 실종되고 윌의 가족과 친구들이 사건에 뛰어드는데요. 윌의 가족은 싱글맘인 엄마와 사진광인 형이고, 친구들은 윌과 함께 방과후에 모여 <던전 앤 드래곤>을 하는 평범한 중학생 남자아이들입니다. 사건을 알아보던 중, 마을 근처에 수상쩍은 정부의 비밀 연구소를 발견하고 이곳에선 머리를 빡빡 깎은 어린 소녀가 탈출합니다. 소녀를 발견한 남자아이들은 그 아이에게 일레븐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지요. 이후 이야기는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직접 확인하세요!
더퍼 형제들은 이번 시즌은 자기들이 만든 설정집의 표면만 건드렸을 뿐이고 시즌이 계속되면 더 깊은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말합니다. 믿죠. 하지만 시즌1의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독창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인물관계, SF, 판타지, 호러를 버무린 설정 모두 익숙하죠. 이번 시리즈의 매력은 익숙한 이야기와 설정 자체보다는, 이들을 꾸려가는 각본의 질과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시대배경은 1980년대입니다. 젊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1차 절정기를 맞았고 스티븐 킹이 그의 초기 대표작들을 써냈던 시기지요. 더퍼 형제는 이 친숙한 이야기를 꾸려가면서 80년대 문화의 레퍼런스를 그럴싸하게 숨겨놓습니다. 두 스티븐의 작품 영향도 노골적이지만 (스티븐 킹은 트위터에서 이 작품을 격찬했습니다.) <구니스>, 존 카펜터의 <괴물>과 같은 작품들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어요. 보다 보면 너무 레퍼런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교활하게 잘 짜여진 드라마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될 시즌 2가 더욱 기대가 되는 것이죠. 80년대를 추억하게 만드는 미장센과 함께 호러, SF, 오락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꿀잼물을 찾고 계신 분들께 <기묘한 이야기> 추천드립니다.
앞서 추천해드린 영화를 보고 난 후, 남은 여운을 달래줄 다른 영화 몇 편도 추천해 드릴까 합니다. 일단 영화 <팔로우>를 보신 분들껜 1940년대 B영화 제작자인 발 루튼의 작품들을 추천합니다. <캣피플>과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등이지요. 직접적인 충격효과 대신 암시와 분위기만으로 공포감을 조성하는 고전전인 트릭은 다 여기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캣피플>과 <팔로우>의 수영장 씬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으실 겁니다.
또한 <비밀은 없다>를 재미있게 보신 분들이라면 이경미의 전작 <미쓰 홍당무>를 추천드립니다. <비밀은 없다>와 마찬가지로 더 많은 관객들이 봐야 할 명작이니까요. <스프링>과 함께 볼 만한 작품으로는 대놓고 러브크래프트 각색물인 스튜어트 고든의 <데이곤>을 추천합니다. <기묘한 이야기>엔 레퍼런스가 너무 많아서 추천하기 쉽지 않은데요. 그 중 <ET>, <구니스>, <존 카펜터의 괴물> 등은 <기묘한 이야기>를 보지 않더라도 꼭 봐야 할 작품으로 추천드리고 싶네요.
지금까지 영화평론가 듀나가 추천하는 ‘집에서 볼만한 영화’ 4편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번 주말도 30도가 넘는 폭염이 계속된다고 하는데요. 이번 주말엔 밖으로 나가는 대신, 더위를 물리쳐줄 영화들과 함께 집에서 보내는 건 어떨까요? 여기에 시원한 에어컨과 폭신한 베개, 맛있는 주전부리까지 곁들이면 바로 이곳이 지상낙원! 상상만 해도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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