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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동원 서포터즈] 우리나라 역사가 깃들어 있는 땅, 동북3성을 아십니까?


만주의 주 작물인 옥수수밭에서 양을 치는 양치기


조린 공원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 기념비


여러분은 동북3성이 어떤 곳인지 알고 계십니까? 사전적 정의로는 중국 동북쪽에 있는 요령성,길림성,흑룡강성등의 3성을 이르는 말입니다. 사실 이렇게 동북3성을 물어보면 모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만주라는 단어는 어떨까요? 만주의 사전적 정의는 ‘중국의 동북지방 즉 요령성,길림성,흑룍강성 및 내몽고자치구의 동부지역을 포괄해서 가리키는 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만주라는 지역 안에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간도나 요동지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동북3성과 만주는 거의 동일시 되어 사용됩니다. 이제 동북3성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감이 오시나요?






출처:KBS 프로그램 명견만리)


이 중국 동북쪽 3성 지역은 사실 우리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멀리 내다본다면 부여가 영토를 형성하고 있던 곳도 바로 이곳이고 그 부여에서 뿌리를 내려 나라를 건국한 고구려가 위치한 곳도 이곳입니다. 시대를 더 올라오면 1618년 광해군이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후금 정벌에 군대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고 그때 이 지역으로 파병을 나간 군인들이 정착하게 되었던 역사도 있고, 청나라가 수도를 심양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심양지역을 신성한 곳이라고 하여 전 도시를 비워놓고 천도를 했는데 그 지역을 조선인들이 이주를 하여 살기 시작한 역사도 있습니다. 더욱 가까이 와본다면 일제강점기 그곳에서 활동을 했던 독립군의 역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그 지역에서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살았고 그 조선인 마을을 바탕으로 한 수많은 독립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들어 알고 있는 이름들뿐만 아니라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운동을 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분들 중에서 독립운동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업적을 남기신 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흑룡강성 하얼빈역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 의거터. 사진의 좌측 삼각형 위치:안중근의사 우측 사각형 위치: 이토히로부미


바로 이곳에서 이토히로부미를 격살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입니다.

 

하얼빈역에 위치한 안중근의사 기념관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에서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러시아 대장성 대신 코코프체프와 협상을 벌이기 위해 하얼빈에 들어온 이토히로부미를 총으로 격살하고 큰 소리로 “코레아 우라(대 한국 만세)”를 삼창한 후에 러시아 헌병대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지금 하얼빈 역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가면 그때를 기념하기 위해 시계가 9시30분에 멈춰있습니다. 


요녕성 대련시 여순에 위치한 여순감옥


그 사건이 벌어진 후 일제는 러시아에게서 안중근 의사를 인계받고 여순에 있는 여순감옥에 안중근 의사를 가둡니다. 이곳은 원래 러시아가 여순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때 세운 감옥이지만 일제가 여순지역을 침략하여 지배하면서 감옥에 있는 방의 수를 더욱 늘려서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곳에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로는 안중근 이외에도 이회영, 신채호 선생 등이 있습니다. 여담으로 이곳의 형태를 따서 만든 곳이 서대문 형무소입니다.


여순감옥


안중근 의사는 이곳에 투옥되어있는 동안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동양의 평화를 위한 책을 집필하기 위해 전념하셨고 그 내용이 바로 동양평화론 입니다. 짧게 소개하면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의 서구열강의 식민주의에 대응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상이었습니다. 그와 비롯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15가지 이유에 대해서도 쓰여있지만, 미완의 사상이라 A4용지 기준 7~8장밖에 되지 않는 작은 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녕성 대련시 여순에 위치한 관동법원.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곳


당시 제국으로 발돋움하여 침략의 야심을 내보이고 있던 일본의 원로 정치인인 이토 히로부미가 식민지 국

민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당시 전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받았던 재판장


너무 많은 인파와 외신기자들이 몰려 처음 예정되었던 재판장보다 더 큰 재판장에서 재판이 열렸고 그마저도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법원 앞에서 재판 결과를 기다렸다고 하니까요. 이 재판장에서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인 것은 대한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향한 것이니, 만국 형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안중근 의사가 앉아 있었을 재판장의 의자


이곳 재판장에서의 재판은 사실 이미 사형이 결정된 상태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도 당연할 것이, 제국으로 열강의 틈바구니에 끼고 싶던 일제의 입장에서 이런 사건은 너무도 치욕스러운 일이었을 테니까요. 이 재판의 판사인 마나베 재판장은 검사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미소를 머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31살의 청년에게서 이런 기백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관동법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가 직접 새긴 손바닥

 

재판장으로 들어가는 문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선고 받는 날짜는 1910년 2월 14일. 이 짧은 기간 동안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던 안중근 의사는 형의 집행만 남은 상태에서 이를 완성할 때까지 처형을 연기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미완성으로 남은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관동법원의 복도


안타깝게도 그의 시신은 현재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매장한다면 그곳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했던 일제가 암매장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안중근 의사의 시신이 암매장을 위해 옮겨지고 있던 현장을 보았다던 (지금은 노인이 되었지만) 소년의 기억을 더듬어 그곳에 대한 조사를 벌였지만, 여전히 그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흑룡강성 하얼빈시에 위치한조린 공원에 세워져 있는 안중의 의사 기념비





사실 동북 3성 지역에 있는 일제 치하의 역사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흑룡강성 하얼빈시에 위치한731 부대 추모관 신관 전경


하얼빈에 위치한 731부대 추모관 건물의 일부


731부대 추모관 실내 전시물 


마루타라고 불리는 생체실험대상이 된 사람들에 대한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온갖 잔학한 행위가 이뤄졌던 731부대 입니다. 


 흑룡강성 해림시 산시진에 위치한 백야 김좌진 장군 자택


김좌진 장군 자택에 있는 김좌진 장군 동상


해림시에서도 버스로 한참 들어가야 나오는 백야 김좌진 장군이 독립운동을 펼치며 살았던 김좌진 장군의 자택입니다. 


중국 마지막 황제 푸이가 수감 돼있던 요녕성 푸순에 위치한 전범 수용소


전범 수용소 복도


일본의 패망 후 일본에 부역한 전범들을 재판하고 수용했던 전범 수용소. 동북 3성에 위치한 가슴 아픈 역사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 외에도 일본의 침략의 상징인 대련시에 위치한 남만주 철도주식회사터, 요녕성에 위치한 심양에서도 한참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의병장 의암 유인석기념원, 역사의 현장인 심양에 있는 봉천경찰서 그리고 동북3성에서 활동했던 분들의 후손이 모여사는 길림성에 위치한 연변조선족 자치구 까지. 동북3 성에서 만날 수 있는 역사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의 뿌리입니다. 그 뿌리가 흔들린다면 지금의 우리도 있을 수 없겠죠.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서 그 뿌리가 되어 주셨던 분들을 꼭 한번 생각해보고 되뇌었으면 좋겠습니다.